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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입대로 블로그 잠시 접습니다.

예전부터 쓰고 있던 수능 한국 근현대사, 수능 세계사나 이번에 새로 올리기 시작한 몽골 개설의 끝을 보고 싶었습니다만, 저의 학문은 본래 벌레나 새기는 작은 재주인데다 천성이 게을러 그 끝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제가 미처 쓰지 못한 부분은 이미 많은 분들께서 저보다 더 깊이 있고 재치 있게 쓰신 글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제가 쓴 글에는 비할 데 없이 훌륭한 글들로, 저 역시 많은 가르침을 받은 바 있습니다.

비단 역사 속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것이든 문장으로 나타내는데에는 분명히 많은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제 글을 읽게 된다면, 표현 하나하나에 얽매이지 말고 좀더 풍부한 상상 속에서 제 글 전체를 음미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작게는 문제의 답안이, 크게는 인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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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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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종교

1. 샤머니즘
  샤
머니즘은 몽골인들 뿐만 아니라 북방의 많은 유목민들이 널리 믿고 있는 종교이다. 샤머니즘은 몽골에서 현대에 이르러서도 라마교 이외에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이며 시골로 갈수록, 혹은 몽골 변방에 살고 있는 이민족일수록 샤머니즘을 숭배하는 성향이 강하다. 샤먼은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매개다. 주로 샤먼들은 천신天神을 숭배하며, 하늘에 떠있는 해와 달, 별들은 모두 천신의 위용으로 모두 숭배의 대상이다. 지신地神 역시 그에 뒤처지지 않는다. 고대 몽골인들은 대지를 “어머니 대지”로 간주하여 하늘과 마찬가지로 숭상하고 있다. 또한 몽골인들은 불을 매우 숭상한다. 불을 정화의 매체로 생각하여 불운한 일이 있을 때 두 불길 사이를 통과하면서 몸이 정화되길 기원한다. “집안에 불길이 흥하길 빈다.”라는 말은 집안의 대가 끊기지 않도록 기원하는 것이며, “네 불을 꺼버리겠다.”라는 말은 멸족滅族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인들이 생활하는 게르 안에서 불 위를 뛰어넘어간다거나, 칼로 불을 희롱하는 것은 주인에 대한 실례가 된다. 예전에 몽골인들은 게르 안에 버터로 빚거나 나무로 만든 우상을 두고 경배하였다. 이러한 우상들은 라마교의 영향으로 오늘날에는 거의 모두 부처상으로 대체되었다.

2.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
  중세 이단으로 내몰린 네스토리우스파는 교황청의 방해로 전파의 방향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파는 주로 중국이나 내륙아시아 일대에 퍼지게 되었다. 몇몇 몽골부족들도 네스토리우스파를 받아들여 개종하게 되었는데, 칭기스칸을 키워준 옹 칸 역시 네스토리우스파 교도였다고 한다. 훗날 15세기 무렵 서구에는 이러한 유목민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많은 유럽인들은 이를 ‘프레스터 존’이라 칭하며 마치 환상인양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나갔다. 이러한 착각은 실패에 직면한 십자군에 어느 정도 활력을 주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십자군은 결국 실패하였다.

3. 라마교
  현대 몽골을 지배하는 종교는 라마교이다. 현대 몽골인구의 90% 이상이 라마교를 믿는다고 한다. 라마교의 수입은 과거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원 세조)의 교묘한 정략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쿠빌라이는 라마교와의 연합을 통해 세속의 지존을 인정받았고, 라마교의 승려였던 팍파 역시 라마교의 지존으로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호혜적인 계약은 원이 멸망하여 북상한 북원北元시대에 알탄 칸과 소남 가초의 계약을 통해 다시금 재현되었다. 이로 인해 몽골초원과 티벳고원은 종교적으로 굳은 동맹을 맺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외몽골의 독립을 주도한 생불生佛 젭춘담바 8세가 티벳 사람이었다는 것을 통해 증명된다. 황모파黃帽派 계통인 라마교는 밀교密敎의 형태를 띠며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몽골에 전파된 라마교는 그러한 밀교적인 형태로 인해 그동안 몽골사회를 지배하던 샤머니즘과 혼합된 양상을 보이곤 한다. 라마교 전파 이후 샤머니즘에서 행해지던 많은 행사들이 샤먼이 아닌 라마승들에 의해 치러졌으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게르 안에 모시던 우상들은 부처상으로 대체되었다. 앞에서 몽골의 90%정도가 라마교를 믿고 있다고 했는데, 그 내용면에서는 라마교와 샤머니즘과 명확하게 구분해낼 수가 없다. 더욱이 불교에서 살생과 미신을 금하였지만, 여전히 유목생활을 하기 위해선 살생이 불가피하였으며, 미신의 우상은 부처로 대처되었고 우상에게 올리던 고기 역시 부처에게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 참고문헌
김호동 저, 『황하에서 천산까지』, 사게절, 1999.
박원길 저, 『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 민속원, 1999.

- 참고 사이트
울란바타르 몽골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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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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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면내각과 5.16 군사정변
  4. 19 혁명 이후 허정의 과도 정부는 독재 정권의 등장을 막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의회의 역할을 증대하는 내용이 담긴 개헌을 행하였다(1960. 6. 내각 책임제, 양원제兩院制 의회 개헌). 개헌 이후에는 과거 자유당을 견제하였던 야당인 민주당이 내각의 주역이 되었으며, 총리는 장면, 대통령에는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장면 내각은 이승만 시절부터 꾸준히 지적되어오던 민생고 문제를 없애기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과거 독재정권이었던 이승만 시절과 달리, 장면 시절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많은 내용들이 논의되었는데, 학원 민주화, 노동운동, 통일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특히 통일 문제에 대해 혁신계에선 중립화 통일론, 남북 협상론 등 활발한 통일 운동이 진행되었다.
  국민들의 활발한 운동과 논의와는 달리 장면 정부는 부정선거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더불어, 각종 민주화 요구와 통일에 대한 개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민주당 자체도 신파新派, 구파舊派로 분열되어 적극적으로 개혁에 나설 겨를이 없었다. 

  5. 16 군사정변은 4. 19 이후 ‘혼란하고 어수선하며 기강이 없고 헤이해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박정희 등의 일부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을 일컫는다.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군사 혁명 위원회(박정희 부의장)를 만들어 각종 혁명 공약을 발표하였다. 이후 박정희가 의장을 맡아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국가 재건 최고 회의는 미국의 신임을 얻기 위해 반공 체제를 강화하고, 그동안 의회중심이었던 헌법을 다시 고쳐 4년 중임의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單院制 의회 등의 개헌이 이루어졌으며, 구 정치인의 활동금지, 농어촌 고리채高利債 정리 등의 개혁을 단행하고, 1962년에는 그동안 계획 중에 있었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군부 세력은 각종 개혁이 이루어진 이후에 ‘양심이 선량한 정치인’에게 정권을 양도하기로 하였는데,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 쯤 군정에서 정권을 잡았던 중요 인물들이 제대하여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양심이 선량한 정치인’으로 변모하였다. ‘양심이 선량한 정치인’인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결국 당선되었다. 

Tip. 장면 내각
1960. 6. 내각 책임제, 양원제 개헌
민주당 내각 - 총리 장면, 대통령 윤보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실행하지 못했음
민중의 민주화 요구(학원 민주화, 노동운동), 통일에 대한 논의
장면 내각은 개혁에 소극적 “선 건설 후 통일”
1961. 5. 16 군사정변으로 정권 붕괴 

Tip. 5. 16 군사 정변
정변 과정 : 군부의 정권 장악 - 계엄 선포 - 군사 혁명 위원회 - 국가 재건 최고 회의
개혁 : 구 정치인의 활동금지, 농어촌 고리채 정리 단행 / 1962. 경제 개발 5개년 개획 추진
대통령 선거 : 민주공화당 창당, 박정희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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